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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全 國民 必讀★

kuwait park 2015. 9. 13. 10:25

全 國民 必讀

知性人 必讀

 

1807年 獨逸은 나폴레옹 軍隊에 敗했다.
國民들은 絶望 속에서 날로 墮落해 갔고, 社會에는利己心이 充滿했다.
道德과 正義가 失踪된 社會가 바로 當時의 獨逸社會였다.
이 때 한 사람의 知識人이 나타나
獨逸國民에 告함’이라는 題目으로 피를 吐하는 說敎를 했다.
哲學者 피히테(Johann Fichte, 1762~1814)였다.
“獨逸이 왜 敗하였는가? 軍隊가 弱해서가 아니다.
敗한 것은 獨逸人 모두가 道德的으로 墮落하고

 

利己心으로 가득차 있었기 때문이다.
敎育을 通해 國家 魂을 길러야 한다.
來日로 미루지 말고 지금 當場 實踐하자!”
그 後 64年이 지난 1871年,

 

獨逸國民은 프랑스를 占領하고 돌아오는 英雄몰트케

(Helmuth Karl B. von Moltke,

1800~1891) 元帥를 熱烈히 歡迎했다.

이때 寡默한 思想家로 알려진 몰트케는이렇게 말했다.
“獨逸의 勝利는 나와 軍人들의 功이 아니다.

 

初等學校 先生님들의 功이다.

 

이 모든 榮光을 그들에게 돌린다”

無任乘車를 가장 부끄럽게 여기는 先進國 指導者들

 

美國의 英雄 케네디大統領은 海軍에 들어가 南太平洋 戰鬪에서 큰 負傷을 입었고,

그로부터 얻은 痛症으로 因해 平生 동안 鎭痛劑와 覺醒劑로 살았다 한다.

케네디는 脊椎부터 창자까지 성한 데가 없었지만

 

陸軍將校候補生試驗,海軍將校候補生試驗에 줄기차게 挑戰했다.
그리고 퇴짜를 맞았다.
結局 億萬長者 아버지에게 哀切한 便紙를 썼고,

 

아버지는人脈을 움직여 아들을 海軍에 入隊시켰다.

모두가 2次大戰에 參戰하는데 參戰隊列에 끼지못한

無任乘車者의

資格을 가지고는

 

指導者는커녕 어떤 公職에도 갈 수 없었던 것이

當時 美國社會의 道德律이었다.

트루먼은 眼鏡이 없으면 장님이었다 한다.
그런데 그는 身體檢査에 合格하기 위해視力檢査表를 달달 외워서 軍에 入隊했고,
1次世界大戰에 砲兵 大尉로 프랑스에서 싸웠다한다.

 

 

 

英國이 戰爭을 치르면戰線에서 가장 앞장서는 사람들이

 

貴族들과 옥스퍼드, 케임브리지 大學 出身들이라 한다.
가장 무거운 軍裝을 짊어지고 機關銃을 向해 가장 앞서 달려가는 사람들이

 

바로 이들이라 한다.
1950年代에 次例로 英國 總理를 지낸 애트리, 이든, 맥밀런이

바로

이들이었다 한다.
이들 學友들의 3分의1이 戰死했고, 英國 貴族의 20%가 戰死했다 한다.
貴族과 名門大學 出身의 戰死者比率은

 

勞動者, 農民보다 倍씩이나 높았다 한다.

이것이 바로 노블레스 오블리제다.
6.25戰爭初期에 參戰한 24師團長 딘 少將이 물을 찾는 部下에게

물을 떠다주기 위해

 

한밤중에 벼랑으로 내려가다가 甚한 負傷을 當해 結局 捕虜가 됐다.
86kg의 體重이 2個月 만에 58kg가 되었다.
밴프리트 將軍이 6.25戰爭에 아들을 參戰시켰다가 그 아들을 잃었다.
아이젠하워 大統領과 클라크 將軍도 韓國戰에 아들을 보냈다.
워커將軍은 아들과 함께 韓國戰에 參戰했고, 스스로는 목숨을 잃었다.
日本歷史家들은 社會指導層의 參戰雰圍氣 側面에서 日本은

美國 및 英國에 比해

相對가 안될만큼 매우 低調했다는 것을 發見하게 되었고,

2次大戰에서 日本은 敗할 수 밖에 없는 나라였다고 診斷했다 한다.

聯合體制를 허물은 자다.
李明博은 理解될 수 없는 病名들로 無任乘車를 했고,

 

執權 與黨인 한나라黨 代表가 된 상수는

司法試驗으로 身分上昇을 꾀하느라11年 동안이나

逃避하면서 無任乘車를 했으며,

江原知事로 當選된 이광재는 無任乘車를 하기 爲해

멀쩡한 손가락을 斫刀로 잘랐다.

天安艦事件이 터진 直後

靑瓦臺에 모인

安保無賃乘車者들이 90%나 되었다.
이런 大統領, 이런 長官, 이런 政治首腦, 이런 道知事들이

 

前方을 지키는 나라!

이런 나라는 獨逸의 스승 피히테의 表現에 依하면

 

이들은 利己主義者들이요.

 

正義感이 없는 者들이요,愛國心 ‘國家 魂’이 없는 者들이다.
愛國의 魂이 없는 者, 卑怯한 者,

 

不道德한 者, 利己主義者들인 것이다.
이런 者들이 指導者 자리들을 몽땅 다 차지하고 있는 大韓民國은

 

敵과 싸울 수 있는 國家인가?
北韓은 戰爭英雄, 對南工作英雄들에게 ‘共和國英雄’ 稱號를 내리고,

 

그들의 家族들에게도 最上의 特別待遇를 해주기 때문에

누구든 英雄이 되고 싶어 忠誠을 다한다.

反面 우리는 어떠한가?
이 나라를 北傀로부터 지켜내기 爲해 勇猛스럽게 싸워

 

最高의 勳章인 太極武功勳章을 받은 名譽의 勇士가

 

月 37萬원으로 거지처럼 살고 있다.
그까짓 勳章이 무슨 所用인가?

다친 사람만 悲慘하고 죽은 사람만 抑鬱한 것이다.
6.25 參戰 勇士에겐 月 18원만 던져주면서

 

日本에서 北의 工作金 가지고 잘 살고있는

骨隨巨物 빨갱이 곽동의에게는 月 100萬원씩 奉養한다.

光州에서 警察과 軍을 죽인 暴徒와

 

釜山東醫大에서 警察을 새카맣게 태워

 

죽인 極烈學生들에게는 數億원씩을 안겨주면서,

때려 죽이고 태워 죽인 軍과 警察을 向해서는 國家暴力輩라 蔑視한다.

北韓의 師團長은 每月2回씩

最前方

GP에가서 兵士들과 밤을 새우며 警戒勤務를 서는데,

 

그를 對敵한 우리師團長은 파리가 落城할程度로 軍靴를 닦아신고

 

憲兵처럼 勤務服에 주름을 잡고, 밤이면

部下들과 어울려 爆彈酒 마신다.

天安艦爆沈에 憤怒하기는 커녕 非常勤務中인데도 退勤만 하면

술집으로 달려간다는

初級幹部들!
엄마에게 電話를 걸어 '戰爭이 날지 모른다'며 울먹였다는 兵士들!
이런 將軍, 이런 將校, 이런 兵士들이 前方을 지키는 나라!

 

여기에 金正日.김정은 追從者와左派間諜이 득실거리는

 

國家아닌 國家의앞날이 걱정스럽다.
모두가 맞는 말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가슴에 손을 대고

곰곰히

생각해 봐야할 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렇게 살았습니다§▒

국민체조를 의무적으로 했었죠..
국민체조 시작하며 구령소리가 나면 길가다가도 마춰하던 체조
기억나시죠 ? 분명 이런 시절이 우리들에게 있었습니다
청계천 판자촌 뒷골목이라네요..
하꼬방촌 루핑집들
5.60년대 어딜가나 볼수있는 거리와 전경
이 등에 업힌 어린이와 엄마가 빈민국 한국을 경제대국으로
이끈 주역들이지요
요사이 TV속 동남아의 가난한 골목같네요
판자촌들 그래도 즐겁게 뛰노는 어린이들
행복하냐고 물어본다면 행복하다고 할겁니다
세계 최빈민국 '방글라데시'가 행복감 세계 일위라고 하는걸 볼때 ...
이 판자촌에도 방을 얻고저 하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소개해주고 몇푼이라도 벌자고 여기에도 복덕방은 존재 했겠지요 ?
전농동 제방길입니다
이때만 해도 그 알량한 자전거도 흔치않던 시절
어린 시절 추억의 군것질
그래도 벌어보자고 노점상을 차려놓고
가난해도 머리를 상투틀지 못하기에 깍아야하기에
여기에도 이발소는 존재한답니다
이 어린이들이 지금은 나이가 5.6.70대가 되였겠지요
가난하여 학교에 못가는 아이들을 위해 공민중학교 같은곳이 생겨나고
검정고시를 치뤄 자격증을 취득하기도 했지요
지긋지긋한 물지게 지고 나르기
중량천 판자촌 철거시작 그래도 이곳떠나면 어디가서 살라고끝까지 버티고있는 소수에

판자촌 실태

이곳에서 살던 사람들이 이주하여 성남 대단지가 형성됨
중량천은 썩을대로 썩어 악취가 만연하고 어느 생명체도 살아있지 않은 하천
요즘 중량천엔 장미꽃이 천국을 이루고 하천엔 잉어떼와 피라미떼들이
다모여 제식훈련을 받고있으니 세상 참 많이 변햇지요 ?니다.
청계천 봉제공장의 누이들..
저 열악한 환경에서 전태일 열사가 분신했죠..
삽입곡 이미자 노래 영화주제가[저강은 알고있다]원곡입니다
신문잡지 가판대 경찰 단속 중
이때만해도 제법 잘 지여놓은 청량리역앞 대왕코너앞
이건물이 그땐 불도 잘 나드니만 사람도 꽤나죽고
저 시절이 눈에 선한데....

 

지금은 경제적으로 더 부유해졌는데그만큼 더 행복해 졌을까요?한번 뒤돌아 봅시다
(옮겨온 글)

"李承晩은 옳다고 믿으면 세계 여론과 강대국도 무시한 사람."
로버트 T. 올리버 박사의 인물평
올리버는, <이승만의 진면목은 자신의 신념이 세계의 여론이나 최강국의 정책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경우에도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인물>이란 점이라고 했다.
 그는 인기에 영합하는 기회주의자가 아니었기에 모든 사람들이 옳다고 믿는 것조차
개의치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옳은 방향이라고 마음을 정하면 자신과도 타협하지 않고
비판 여론은 아예 무시하였다.

<그는 역사의 길이라고 믿으면 주저없이 나섰고,
뒤 늦게 좇아오는 이들을 기다렸다.
그는 '위대한 정치적 예언자'의 한 사람으로 역사에 남아야 할 인물이다.>

趙甲濟
李承晩 대통령의 對美 홍보 고문 역할을 하였던 로버트 올리버가 쓴 책

'李承晩'(SYNGMAN RHEE-The Man Behind The Myth. 번역 徐廷洛, 단석연구원)의
마지막 장은 인물평이다.
<우리 시대의 가장 걸출하였던 위대한 인물 중에서 그는 아마도 가장 덜 알려진 인물일 것이다. 위대한 정치가가 반드시 강대국에서만 배출되는 것은 아니다.
약소민족중에서도 얼마든지 큰 인물이 나올 수 있다. 이승만은 참으로 위대한 인물이다.
그는 조직력과 지도력,
그리고 예언자의 비전을 두루 갖춘 인물이었다.>
올리버는 李承晩의 한 宿命은 비난을 받는 일이었다고 했다.
그만큼 誤解와 비방을 많이 받은 지도자는 드물다는 것이다.
<그는 가끔씩 골칫덩어리로 무시되었다.
그의 요구는 거절되었지만 그를 몰아낼 수는 없었다.
그는 거듭 비난 받았지만 그의 정책과 판단이 옳았던 것으로 거듭 증명되었다.
그의 주장은 옆으로 밀려버리기가 일쑤였지만 그가 예견한 사건의 논리는
곧 바로 그를 세계적 문제의 한 가운데로 돌려놓곤 하였다.>
올리버는 이승만을 이렇게 규정한다.
<대한민국의 건국자, 아시아 민주주의 확산의 촉매자,
미국인의 반대를 무릅쓰고 미국인이 수호해온 '도덕적 가치 기준'을 극동지역에서 지켜낸 사람.>
올리버는 <참으로 이상한 것은 이승만은 그의 친구들보다는 그를 비판해온 이들로부터
더 높은 평가를 받았다>는 점이라고 썼다.
이승만은 초인적 힘을 지녔다고 평가되기도,
모순덩어리라고 평가되기도 하였다.
올리버는 이승만에 대한 비판이 모순투성이였다고 했다.
공산주의자들은 그를 미국의 꼭두각시라고 비방하다가 때로는 '미국을 좌지우지 한다'느니
'미국을 끌어들였다'고 욕하였다.
이승만처럼 國內外로, 公私間에 욕을 많이 먹은 이도 드물다는 것이다.
<그는 두 미국 대통령, 두 영국 수상, 두 유엔 사무총장,
그리고 호주 인도 캐나다의 장관급 인사들로부터 우방국 元首에게 보내는 편지로서는
너무나 날카로운 비판을 받은 사람이다.>
그런가 하면 열렬한 지지의 대상이기도 하였다.
<그는 격렬한 비난을 받는 가운데서도 헌신적이고 충성스러운 지지를 얻어내는
놀라운 능력을 보였다.>
이승만을 욕하는 이들도 그가 초인적 능력을 가졌다는 점은 인정하였다.
특히 國政의 세부사항까지 파악하고 챙기는 데 놀랄 따름이었다.
올리버는 이승만에 대한 비판의 수준을 이렇게 비꼬았다.
<신문과 잡지들은 그를 논할 때 '미 군정의 도움으로 권력을 잡았다'면서 한편으론
'남한에서 美 군정이 실패한 이유는 그의 비협조와 反美주의 때문이다'고 했다.
그를 '반동분자'라고 욕하다가 갑자기 '사회주의자'라고 비판하였다.
地主와 자본가를 결속시킨다고 욕하다가 갑자기 일반 대중을 선동하여 정치적으로 이용한다고 비방했다. 그가 테러집단의 독재자처럼 반대파를 용인하지 않는다고 비판한 이들은
이승만이 국회, 언론, 서구식 교육을 받은 정치인과 사업가들의 줄기찬 반발에 직면하였던 점은 어떻게 이해할까.
그는 충성분자들만 관직에 임명하였다고 비판 받았지만 사실은 각료들과 계속 마찰을 빚었다.>
올리버 박사는 그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쏟아내는 비방에 대하여 그를 잘 아는 유명 인사들이 변호를 해주었으므로 그나마 다행이었다고 했다. 이승만을 오래 곁에서 지켜본 올리버의 통찰력이 돋보이는 평을 소개한다.

올리버는, <이승만의 진면목은 자신의 신념이 세계의 여론이나 최강국의 정책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경우에도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인물>이란 점이라고 했다.
그는 인기에 영합하는 기회주의자가 아니었기에 모든 사람들이 옳다고 믿는 것조차
개의치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옳은 방향이라고 마음을 정하면 자신과도 타협하지 않고 비판 여론은
아예 무시하였다.
<그는 역사의 길이라고 믿으면 주저없이 나섰고, 뒤 늦게 좇아오는 이들을 기다렸다.
그는 '위대한 정치적 예언자'의 한 사람으로 역사에 남아야 할 인물이다.>
※휴전 협상때 이승만 대통령은 끝까
지 북진통일을 원했지만 어려워 지자 한미 동맹을 성사시키는 능력을 발휘했다.
그것이 오늘의 대
한민국을 지키는 결과가 될줄 그당시 누가 감히 예상했을까?

올리버는 이승만이 위대한 업적과 달리 인간적으로는 참으로 겸손하고
소박한 어른이었다고 평하였다.
< 술, 담배는 하지 않았지만 수도승처럼 산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좋은 음식과 독서,
그리고 담소를 즐겼고, 애완견을 사랑하였고 낚시 정원가꾸기,
그리고 서예도 즐겼다.

 

그는 자신이 옳은 일을 하고 있고 국민과 역사가 자신의 편이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언제나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았다.>

이승만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주의 종'이었다.
부인과 함께 하는 아침 식탁에서 성경 한 두 장을 낭독하는 것이 일과였다고 한다.
기도는 그에게 마음의 위안을 주고 신앙을 재확인하는 자극제였다.
자신이 하는 일이 아무리 거센 비판을 받아도 기도로 자신이 옳다는 확신이 들면
최후의 승리를 믿었다.

올리버는 이 책 마지막 문단에서 이승만의 역사적 역할을 멋지게 요약하였다.
< 그는 22세에 총리가 된 영국의 윌리엄 피트처럼 단 번에 명성을 얻지 않았고,
히틀러처럼 대중선동으로 권력을 잡지도 않았다.
그는 또한 루즈벨트나 처칠처럼 정치적 계단을 끈기 있게 밟아 頂上에 오르지도 않았다.
그는 동서양의 최고 교육을 자신의 것으로 鎔解(용해)하였다.
그는 위대한 理想의 추구에 헌신하였고,
때가 이르자 한국인들의 지도자로서뿐 아니라 위기의 시간과 장소에서
全세계 자유민들의 요구에 부응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貞節婦人의정문(旌門)

 

무과에 급제해 부산으로 발령 받아 내려가던

조익 [趙翼, 1579 ~ 1655] 이 밀양에서 날이 저물어 하룻밤을 주막에서 묵어가는데

술을 한잔 하자 불현듯 지난 일이 떠올랐다

‘십여년 전 서당에서 함께 공부하던 친구 박주현의고향이 밀양이었지.

그때 참 친하게 지냈는데….’

밀양에서 뼈대 있는 집안이라 그 집을 찾는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대궐같은 박주현의 집 솟을대문을 두드렸다

하인들의 안내를 받아 사랑방에 좌정하자 소복을 입은 젊은 부인이 나와 인사를 하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박주현은 한달전에 죽었고 소복 입은 부인은 바로 박주현의 미망인이었다.

안방 옆 곁방에 차려 놓은 빈소에서 조익이 절을 올릴 때 미망인은 섧게 곡을 했다

조익은 박주현의 자취가 담긴 사랑방에서 하룻밤묵어가기로 했다.

촛불을 끄고 누웠어도 잠이 오지 않았다 박주현과 함께 천렵과 수박 서리를 하던 때를 생각하며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다 보니 삼경이 가까웠다

그때 ‘쿵’ 하고 담 넘는 소리에 이어 뒤뜰 대나무 밭을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조익은 잽싸게 문을 열고 나가 기둥뒤에 몸을 숨기고 대나무 밭을 응시했다.

도적이구나!

그런데 대나무 밭에서 나온 도적이 처마 밑으로

몸을 숨겨 안방으로 들어가는 게 아닌가.

안방에 촛불이 켜졌다.

조익은 뒤뜰로 가 열어 놓은 들창으로 안방을 들여다봤다

이럴수가!

“오늘밤은 소복을 입으니 더 예쁘네 잉.” 땡추가 미망인을 껴안고 있었다.

목소리를 낮추라며 손가락으로 땡추의 입을 막은 미망인은

부채로 화롯불을 살려 석쇠를 올리고 그 위에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미망인이 미리 차려 놓은 주안상을 당겨 약주를 따랐다

한잔 마신 땡추가 입을 벌리자 미망인은 석쇠 위의 고기 한점을 입에 넣어 준다.

번들번들 개기름이 낀 땡추는 윗옷을 풀어헤치고 비스듬히 보료에 기대어 한손엔

술잔을 들고 다른 한손으로는 미망인의 엉덩이를 쓰다듬었다

고기 안주에 술이 얼큰해진 땡추가 미망인의 옷고름을 풀었다

미망인이 코맹맹이 소리로 “잠깐만. 상 치우고 올게요.”

하며 부엌으로 나가자 조익은 끓어오르는 분을 참을 수 없어

옷 속에 품고 다니던 장도를 꺼내 들창 안으로 던졌다

땡추가 목덜미에서 선혈을 쏟으며 고꾸라지는 것을 보고

조익은 잽싸게 사랑방으로 돌아갔다

잠시후 안방에서 미망인의 비명소리가 들리고

집안의 하인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날이 새자 밀양 관가에서 형방과 나졸들이 나오고

친인척도 몰려와 집안이 어수선 해졌다.

조익은 모른 척 행랑아범에게 무슨 일인지 물었다

“간밤에 미친 땡추가 상중의 안방마님을 겁탈하려고 들어왔다가

안방마님의 장도에 찔려 죽었습니다

안방마님은 자살하려는 걸 저희들이 막았습니다.”

이듬해 다시 밀양땅에서 하룻밤 묵게 된 조익이

박주현의 집을 찾았더니

집 앞에 정절부인에게내리는 정문(旌門)이 세워져 있었다

조익이 친구 집안의 명예를 살린 것이다 

= 옮겨온 글 =

출처 : 우대받는 세대
글쓴이 : 김서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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