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경자의 한(恨)과 고독은 세속적 탄식 아닌 창작의 원동력 이 책은 저자가 책머리에서도 밝혔듯이, 본격적인 평전이라고 하기보다는 저널리스트가 엮은 천경자 선생의 삶과 예술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천경자를 바라보는 시각은 세간의 통설과는 거리가 있다. 무엇보다 천경자 선생이 한(恨)의 작가, 고독한 작가라는 평가에 동의하지 않는다. 저자는 천 선생이 누구보다 인생을 축제처럼 산 팔자 좋은 화가라고 말한다. 천경자 선생의 한과 고독은 세속적 탄식이 아닌 창작의 원동력이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그의 한은 슬프고 어두운 게 아니라 화사하고 밝다고 말한다. 피맺힌 가슴속 응어리가 아니라 아름답고 화려한 감정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그동안 천 선생의 화업이 정한(情恨)·고독·슬픔 같은 감성적 접근, 상징적 주제와 환상적인 색채 같은 수사적(修辭的) 접근, 또는 동양화니 채색화니 하는 장르나 재료적 접근으로 경도된 감이 없지 않았다”며 이제는 그러한 틀이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통시적이고 종합적인 평가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슬프다, 화려하다, 섬뜩하다, 환상적이다 하는 감성적 시각 못지않게 왜 그가 꽃을 그렸고, 꽃은 그에게 무엇이며, 어째서 그는 마녀 같은 눈동자의 여인을 형상화했으며, 무엇을 찾아 지구를 몇 바퀴 도는 스케치 기행을 했는지 그 실체를 밝혀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천경자의 슬픈 전설은 49페이지로 끝났다 이를 위해 저자는 ‘천경자 다시 보기’를 시도한다. 천 선생이 자서전과 화제(畵題)로 즐겨 쓴 ‘내 슬픈 전설’은 49페이지로 끝났다면서 그의 일생은 한판 굿처럼 신명이 넘쳤고 늘 구경꾼이 몰리는 축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말한다.
약값도 없어 여동생을 저 세상으로 보내고 첫 결혼 실패, 유부남과의 사랑 등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고통 속에서 충격적인 소재와 탁월한 묘사력, 치밀한 구성의 뱀 그림 <생태>로 세상과 정면 승부함으로써 인습과 매너리즘에 빠진 화단에 일대 경종을 울리고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알린 천 선생의 대담한 시도는 그가 단순히 한의 노예가 아님을 보여 준다는 것.
채색과 풍물로 일군 독창적 화풍, ‘천경자풍’ 또 천경자 하면 으레 동양화가라는 수식어가 붙는데, 천경자 선생은 동양화·서양화 경계가 필요없는 독창적인 화풍을 일구어 낸 작가라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천경자만큼 세계를 누비며 미지의 문명과 인간의 삶, 그리고 동식물과 태양이 어우러진 자연을 두루 섭렵하고 다큐멘터리적인 작업을 남긴 화가도 흔치 않을 것이라면서, 천경자 선생은 스케치북 하나 들고 현장의 진실을 담기 위해 사하라 사막에서 아마존 정글까지 누빈 끝에 붓 하나로 지구촌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고 말한다. 그렇게 그린 그의 풍물화는 따뜻한 손맛이 있고 감정이 묻어나 누가 봐도 감흥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는데, 그것은 현장의 아우라가 있고 현장에서 잡아낸 진실의 힘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
1924년 외조부를 그린 <조부>가 제22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한 이래 2003년 몸져눕기까지 붓을 놓지 않았던 천경자 선생의 화력을 저자는 크게 두 시기로 나눈다. 1969년을 기점으로 꽃과 인물을 주로 한 채색화 시기와 그 이후 세계를 기행하며 스케치해서 그린 풍물화 시기가 그것이다.
저자는 채색과 풍물화로 독창적 화풍을 일군 천경자의 작품 세계를 미술평론가 신항섭씨와 박래경씨의 말을 빌려 ‘천경자풍’이라 표현하면서 세밀한 스케치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원색에 흰색을 적절히 배합시킨 불투명의 과슈로 윤곽선이 드러나지 않게 꽉 채운 채색력은 다른 작가에게서 보기 힘든 천경자의 독창적인 양식이라고 말한다.
불타는 예술혼으로 자신을 해방시킨 여자 한편 인간 천경자는 불타는 예술혼으로 자신을 해방시킨 여자라고 했다. 보통 여자들이 하지 못하는 여러 가지 기묘한 짓을 하곤 하는 것도 그가 유치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해방시켜 자기만의 감성 세계에 솔직해진 탓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천경자 선생의 인간적 면모를 그려내기가 쉽지는 않지만 예술가로서 자신의 세계와 인간으로서의 삶, 그 모든 것을 그림과 글을 통해 다 털어놓고 살았다는 것, 집시 같은 방랑벽을 가졌다는 것, 영화를 좋아하고 꽃을 즐겨 그렸으며 자신을 연출할 줄 아는 멋쟁이였다는 것 등은 말할 수 있다면서 독자적인 예술 세계와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던 천경자 선생의 삶과 예술을 그의 글과 그림을 통해 조명하고 있다.
천경자의 대표작·미공개작도 실려 있어 읽고 보는 즐거움 두 배 이 책은 크게 1부 ‘천경자 다시 보기’, 2부 ‘작품세계와 작가의 내면’, 3부 ‘천경자의 삶과 예술’, 4부 ‘세계를 누빈 스케치 기행’, 5부 ‘슬픈 전설의 49페이지’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이번에 열리는 전시회 ‘내 생애 아름다운 82페이지’ 카탈로그에 쓴 저자의 서문과 1976년 천경자 선생과 했던 첫 번째 인터뷰, 천경자 선생의 육성을 생생히 들을 수 있는 글 한 편,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 <환상여행>, <생태>, <길례 언니>, <단장> 등 천경자의 대표작과 미공개작 등도 함께 실려 있어 보는 즐거움을 한층 배가시킨다. 이밖에 페이지 곳곳에 천경자 선생이 그린 채색화와 풍물화, 스케치, 드로잉들도 많이 실려 있어 천경자 선생의 삶과 예술을 음미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